꽃과 시
청보리 꽃 잠든 밤에 - 백송기
내 영혼 잠들지 못함은
그대 항상
내 마음의 창가에 지는
저녁노을서성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목련꽃 그늘 아래
바람결
자욱한 외로움의 향기로 다가올 적에
푸르른 정열
이 가슴 하나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다짐도 했읍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 그대를 위한 나의 사랑을
너무나 오랫동안 간직했던
나의 사랑을
그리움으로 한없이 감싸왔던 이 밤
맞닿은 한 자락 어둠을 열어 전하옵니다.
이슥토록 목울음 구슬픈 산비알
청보리밭엔 시방
물결 그윽한 괴로움 속을 헤메는
소쩍새 한 마리
사록사록 내리는 밤비에 젖고 있읍니다.
고요히 사윌 감싸는 내 사랑도
내리는 빗소리에 젖을 때이면
언제인가 꼭 한번은 멈출 것입니다.
다만
청보리꽃 곱게 단장하고
끝없는 기다림으로 설레이는
흙의 순수를 위해
반딧불만한 등불 하나
이 가슴에 간직할 일 남았읍니다.
비 개인 하늘 아래
청보리꽃이 지고, 여름이 가고, 낙엽이 떨어지고, 흰눈이
내리고..... 다시
봄이 오면
허허로이 물결 이는 들녘 가득
청보리꽃이 필 것을 믿으며
스스로 태양을 쫓는
해바리기처럼
노고지리, 나의 꿈, 나의 사랑, 나의 믿음을 전하렵니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누가 유채꽃을 꽃이라 하는가 - 차옥혜
누가 호수의 저 녹색물을
그냥 물이라 하는가
몇 번이고 없어진 나라
몇 번이고 흩어진 민족
약속의 땅을 그리며
창칼에 쓰러진 영혼들
긴긴 모래바람 세월
흘린 눈물 모여 고인
호수인 것을
이방인에게 짓밟혀
통곡하던 간장들 녹아 흐른
호수인 것을
누가 호숫가에 노랗게 핀
저 유채꽃을
그냥 꽃이라 하는가
평생 땅에 엎뎌
손발이 닳고
허리가 굽도록
일하여도
헐벗고 굶주리던 사람들
그물을 던지고 던져도
춥고 서럽던 사람들
쇠사슬에 묶여 먼 이역까지 끌려가
강제 노역에 채찍에
지쳐 죽은 노예들
죽어 살던 종들
가족도 집도 빼앗기고
방랑하는 사람들
죄 없이 쫓기다
맞아 죽은 사람들
버림받은 병자들
멸시받던 여자들
천대받던 어린이들
제 목숨 못 살고 간 이 모든 넋들이
유채꽃으로 피어나
눈물의 땅일지라도
다시 돌아와
그렇게 송이송이 한번쯤
꽃으로 피고 싶었는 것을.
접시꽃 당신 - 도종환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 것 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 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장미 - 송욱
장미밭이다
붉은 꽃잎 바로 옆에
푸른 잎이 우거져
가지도 햇살 받고
서슬이 푸르렀다.
벌거숭이 그대로
춤을 추리라
눈물에 씻기운
발을 뻗고서
붉은 해가 지도록
춤을 추리라
장미밭이다
피 방울 지면
꽃잎이 먹고
푸른 잎을 두르고
기진하며는
가시마다 살이 묻은
꽃이 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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