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훔쳐보기
훔쳐보기 혹은 그 병적인 상태인 관음증(Voyeurism)은 불륜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법적 금기로 간주된다. 그 행위 안에 내재된 비윤리성 때문이다. 그
러나 훔쳐보기는 기 일상이 된지 오래다. 관음증은 매우 인기 있는 영화 소
재이자 주제다. 영화 연구, 특히 정신 분석학적 연구에서는 관객들의 영화
보기와 연관시키며 관음증을 당연시하기도 했다. 관객이 어두컴컴한 극장에
서 스크린에 투영되는 이 이미지를 지켜보는 행위 자체가 관음증의 또 다른
형태라는 것이다. 이 관음증의 문제를 깊이 파고든 김독들이 여럿 있는데 대
표적 감독이 히치콕이다. <이창>(1954년), <현기증>(1958년), 사이코(1960
년) 이 세 편은 관음증 3부작이라고 일컫어진다. 이중 역사적 의미가 가장
큰 기념비적인 작품은 <이창>이다. 관음증의, 관음증에 의한, 관음증을 위한
흥미 만점인 걸작이다.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주인공 제프리(제임스 스튜
어트)는 자기가 왜 그렇게 훔쳐보기에 집착하는지 이유를 모른다. 히치콕 감
독은 제프리의 직업을 사진 기사로 설정하여 그의 행위에 일말의 정당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자신이 왜 그렇게 관음증에 집착하는지를 은근히 강변한다.
그러나 <이창>은 살인 사건을 둘러싼 플롯에 집중하느라 인물들의 심리를
추적하는데는 미진하다.
관음증의 심리까지 파고든 최고 걸작은 프랑스판 <이창>이라고도 하는 파트
리스 르콩트 감독의 <살인 혐의>(1989년)이다. 병적인 주인공 이르씨(미쉘
블랑)는 주위 사람들에게 철저히 왕따를 당한다. 유일한 낙은 매력적인 이웃
집 아가씨 알리스(산드린 보네르)를 엿보는 것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관음
증이 일종의 위로와 치유 행위임이 드러난다. 폴 슬레탄느 감독의 <정크 메
일>(1997년)의 우편 배달부 로이에게도 관음증은 구원의 행위다. 남의 편지
를 훔쳐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그 앞에 어느 날 리네가 나타난다. 성적 호
기심에서 출발한 훔쳐보기는 서서히 이해와 사랑으로 탈바꿈한다. 그 과정이
예상치 못한 짙고 그윽한 감동을 준다. 라스트 신인 로이와 리네가 나란히
함께 걸어가는 뒷모습은 큰 울림을 준다. 키에프슬로프스키 감독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도 관음증은 사랑의 통로다. 연상의 그녀를 훔쳐보기는
하지만 오히려 정신적 사랑을 믿는 열 아홉 청년 토멕크와 육체적 희열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는 마그다는 진정한 만남을 이루지 못하고 어긋난다.
배창호 감독의 <적도의 꽃>(1984년)은 한국 영화 가운데 유일한 관음증 영
화의 걸작이다. 관음의 주체가 대상으로 위해 손수 살인까지 저지른다는 점
에서 다른 작품들이 선사하지 못한 강한 인상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