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 사지계(死地計)의 활용
『부하를 도망칠 수 없는 곳으로 몰아넣으면 폭발적인 힘이 생긴다.』
이것이 사지계(死地計)다. 이 계책은 에니르기 압축의 현상을 응용하고 있
다. 즉, 일정한 용량을 가진 밀폐된 그릇 속에 공기를 압축하여 압축 공기
를 얻을 수 있는 현상과 같다.
『열심히 싸우면 살아남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단지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의 장소를 사지(死地)라고 한다.』
『도망칠 수 없는 막바지에 이르면 어차피 죽는다고 하는 체념의 심라기
오히려 공포심을 잊게 하고 적극적으로 싸운다. 사생결단의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
그러니까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에게 덤벼든다는 식의 생각이다. 이
계책을 전투에 응용한 대표적 사례가 배수(背水)의 진(陣) 즉, 등 뒤에 강
물을 두고 최후의 결전을 시도하는 방법이다. 사지의 계로서 일대 승리를
기록한 전투는 세 가지가 유명하다. 한신 장군의 정경구 전투와 오자의 진
나라 전투, 삼국 시대 조조의 하북 전투가 있다.
한신의 정경구 전투
한신은 평범한 백성에서 뜻을 세워 마침내 한나라를 창업한 공신이 되었
다. 그는 젊은 시절에 시정의 불량배들이 희롱하여 가랑이로 빠져 나가라
고 하자 내색하지 않고 그대로 했다는 고사가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배포가
크고 지략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가 한고조 유방의 명을 받고 조나라를
정벌할 때의 때였다. 한신은 6만의 대군을 모았지만 갑자기 편성한 부대였
으므로 단결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진격 도중에 시간을 많이
빼앗겼다. 그동안 조나라는 명장 한신의 침공에 겁을 먹고 전국적으로 병사
를 모아 20만 대군을 이뤄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두 부대는 정경구라는 하
천의 진지에서 마주쳤다. 이때 한신은 정상적인 전투 방법으로 도저히 승산
이 없음을 알고 병사들을 강가로 이동시켜 진을 쳤다. 앞에는 20만 대군,
뒤에는 강물이다. 병사들은 사색이 되었다. 벌벌 떠는 군사들 앞에 한신이
나섰다.
“이제 우리는 저 20만 대군을 무찌르지 않는 한 죽음이 있을 뿐이다.
도망칠 수 없다,. 오직 싸워 이기는 길만이 생명을 지킬 수 있다.“
하고 일장 연설을 토했다. 마침내 동요하던 병사들도 비장한 각오를 보였
다. 강물에 빠져 죽으나 적과 싸우다 죽으나 같은 것이다. 열심히 싸우면
어쩌면 적을 물리쳐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한신
은 조나라의 20만 대군을 쳐부수고 승리할 수 있었다.
오자의 진나라 전투
손자병법의 충실한 계승자로 오자를 뻬놓을 수가 없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손자보다 인간 심리를 전쟁에 이용하는데 능숙한 장군이었다. 잔혹하
고 거친 성격의 오자는 이 사지계(死地計)를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활용했고
나중에 정승이 되었을 때는 정치에 응용하여 뛰어난 정치가로 대접받기도
했다. 오자가 위나라를 섬기고 있을 때였다. 위나라 왕은 오자의 말을 받아
들여 궁전에서 연회를 베풀고 신하들을 초대했다. 그런데 연회장에는 크게
술상을 벌이고 둘러 앉은 것이 아니라 세 줄로 상을 차리고 신하들을 세 줄
로 앉게 했다. 맨 앞줄에는 가장 공이 많은 신하들을 앉게 하고 귀중한 보물
로 된 그릇에 최상급의 음식을 차렸다. 둘째 줄에는 공이 약간 적은 신하들
을 앉게 하고 평범한 그릇에 평범한 음식을 차렸다. 셋째 줄에는 별로 공이
없는 신하들을 앉게 하고 시원찮은 그릇에 시원칞은 음식을 차렸다. 그리고
연회가 끝나고 퇴궐할 때에는 맨앞줄의 신하들에게 부모처자에게 줄 선물끼
지 챙겨주었다. 이런 행사가 3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동안 궁궐의 연회에 참
석해본 사람만도 수십만명이 될 정도였다. 마침 위나라에 병란이 일어났다.
진나라가 공격해온 것이었다. 왕이 오자에게 명령했다.
“3년 동안 공이 많은 신하들에게 충분히 대접을 했으니 그들을 출동시
켜라. 아마도 빠른 시간에 적군을 무찔러 버릴 것이다.“
오자가 왕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대저 병졸을 쓰는 데는 계교가 있는 법입니다. 제게 셋째 줄
에만 앉았던 신하 5만을 내려주십시오. 그들은 바로 궁지에 몰린 적과
마찬가지의 기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진군을 모조리 쓸어버리겠습니다.“
오자가 이끄는 이 부대느 10배가 넘는 진나라 50만 대군을 격파했다. 출정
에 앞서 오자의 격동지계(激動之計)가 성공한 것이었다.
“제군들 그대들은 3년 동안이나 얼마나 천대를 받았느가? 부모 자식들에
게서 손가락질을 받았고 왕에게서도 셋째 줄에만 초청되었다. 어째서 그
런 일이 있었는가? 공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군들이 공적을 세울
유일한 기회가 왔다. 진군을 쳐부수고 우리도 첫째 줄에 앉는 영광을 누
리자!“
이런 약점을 파고드는 권력의 비열함이 바로 사지계(死地計)의 활용이다.
조조의 하북 전투
조조는 삼국 시대 역사를 바꾼 두 개의 전투에서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대패했다. 이긴 전투가 바로 하북 전투이고 진 전투가 적벽 대전이었다.
원소와의 하북 전투, 이것은 구세대의 상징격인 원소와 신흥 세대의 구심
점인 조조가 중원의 패권을 놓고 격돌한 전투였다. 황하를 사이에 두고 북
쪽의 익주에 원소가, 남쪽의 허창의 조조가 숙명적으로 대립하다가 원소는
30만 대군으로 창정에 진출했다. 이에 조조도 즉각 진격했다. 두 대군이 접
전을 벌이자 조조군이 패주하기 시작했다. 조조는 하룻밤 동안 패주에 패주
를 거듭했다. 이른 새벽 패주하는 조조군이 황하에 다다랐다. 눈앞에는 도도
히 흐르는 황하의 강물만이 펼쳐진 뿐 병사들이 타고 도망칠 때는 한 척도
없었다. 이때 조조가 마상에서 소리쳤다.
“제군들, 보시다시피 이제는 도망칠 길도 없다. 부모처자를 두고 이곳에
서 최후를 마칠 것인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적과 죽기를 각오
하고 승부를 내야 한다.“
이 호령에 조조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되돌아서서 사생결단의 각오로 원소군
과 마주쳤다. 양쪽 군대가 똑같이 하룻밤을 계속 진군하고 후퇴했으니 피로
가 엄습하여 제대로 싸울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조조 군대는 필사적으로 맹
공격을 퍼부었다. 마침내 원소는 대패하고 도망쳤다. 이 전투는 조조가 배수
진의 전략을 의도적으로 꾸민 사지계(死地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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